짧은 답
아닙니다. 신약은 예수가 심판자로 돌아오는 것을 그립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는 한 탄 자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심판하며 싸웁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주 예수께서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형벌을 주시리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그의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이릅니다. 요한복음은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기독교인에게는 사랑의 하나님(﷾)이, 무슬림에게는 진노의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꾸란은 자비와 정의를 모두 드러내 놓고 가르칩니다. 예언자(ﷺ)께서는 알라(﷾)의 자비가 그분의 진노를 이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한 설명
그 고발: 사랑 대 진노
어떤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의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고,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 구절을 가리킵니다. 신약의 한 편지인 요한일서 4:8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17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서들 속의 심판자 예수
요한복음은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인자, 곧 자신에 대한 그 자신의 칭호를 그 영광의 보좌에 앉은 이로 그립니다. 그는 그의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이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백마를 탄 자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그 안에서 하늘이 열리고 백마를 탄 자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라고 합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요한복음은 예수를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입에서 나라들을 칠 칼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데, 포도주 틀은 포도를 짓이기는 통입니다. 그 장은 그의 원수들이 죽임을 당하고 새들이 그들의 살로 배부르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한계시록은 또한 짐승, 곧 그 환상들 속 악의 형상을 경배하는 자들이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것이 예수를 부르는 흔한 이름인 어린양 앞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상징으로 가득한 환상이며, 기독교 주석가들은 대개 그 칼을 그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징들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택해졌으며, 그것들이 말하는 것은 사랑만이 아닙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전능하신 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의 재림 때의 불꽃
또 하나의 신약 편지인 데살로니가후서는 상징 없이 같은 것을 말합니다.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비유 하나와 칼 하나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왕위를 받으려고 먼 나라로 갔다가 돌아오는 한 귀인의 이야기를 합니다. 왕으로서 그는 그가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않던 그의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고 명합니다. 이것은 예수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이야기 속 귀인의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주석가들은 그 귀인을 하늘로 가서 왕으로 돌아오는 그리스도로 읽습니다. 예수는 또한 그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누가의 낱말 “분쟁”이 보여 주듯이, 그는 살육이 아니라 가족 안의 갈라짐을 뜻했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오직 화평을 가져오러 온 이의 말이 아닙니다.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비유 속의 귀인을 왕국을 받으러 하늘로 가셨다가 다시 오실 그리스도로 읽고, 그가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않은 백성을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로 읽으며, 이 비유가 그들의 멸망을 예고한다고 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와 광야에서의 벌
킹제임스 성경의 유다서는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다고 말합니다. 한국어 개역 성경도 “주께서”라고 합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서 다시 세운 그리스어 본문을 씁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예수라고 읽습니다. 1세기의 기독교 선교사 바울도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다가 뱀에게 멸망했듯이,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자”라고 경고합니다. 이 읽기를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구약의 벌들 안에 두어야 합니다. 무슬림은 그러지 않습니다. 예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표준 비평 그리스어 신약성경입니다. 제28판은 유다서 5절에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후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신 분을 “예수”(이에수스)로 읽으며, 영어 표준역(ESV)도 거기서 “예수”로 읽습니다. 고린도전서 10:9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처럼 “그리스도”로 읽지만, 어떤 사본들은 “주”로 읽습니다.
“저희 중에 어떤 사람들이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같음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 곧 세 인격 안의 한 하나님(﷾)을 가르칩니다. 그 가르침에서 예수는 율법을 주시고 구약의 전쟁들을 명하신 같은 하나님입니다. 히브리서는 그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기독교인은 온유한 예수를 가혹한 구약에 맞세울 수 없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그는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에게 아말렉에서 아무도 남기지 말라고 명한 주님입니다. 아말렉은 원수 부족이었습니다. 무슬림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예언자이자 종이었습니다. 자비와 정의는 둘 다 오직 하나님(﷾)께 속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자비와 정의, 그리고 어느 것이 더 큰가
이슬람은 심판을 드러내 놓고 가르치며, 자비도 가르칩니다. 꾸란은 자비와 벌을 나란히 둡니다. “실로 내가 관용과 은혜로 충만함이라 그러나 나의 벌은 고통스러운 벌이라”. “나의 자비가 모든 것을 포용하나니”라고 합니다. 그분의 이름 가운데 하나는 사랑하시는 분, 알와두드입니다. 예언자(ﷺ)께서는 알라(﷾)께서 그분의 책에 그분의 자비가 그분의 진노를 이긴다고 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알라(﷾)께서는 어머니가 그 아이에게보다 그분의 종들에게 더 자비로우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슬람은 또한 예수가 돌아와 공의롭게 심판하리라고 가르칩니다.
“나의 중복에게 일러가로되 실로 내가 관용과 은혜로 충만함이라 그러나 나의 벌은 고통스러운 벌이라”
“주여 현세와 내세에서 저희에게 복을 주소서 저희는 당신께로 귀의하였나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이 있었으니 내가 원하는 자에게 벌을 내릴 것이라 그러나 나의 자비가 모든 것을 포용하나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선을 베풀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자들에게 은해가 있게 하리라”
“그분은 관용과 사랑으로 충만하사”
아부 후라이라는 예언자(ﷺ)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알라께서 창조를 마치셨을 때, 옥좌 위 그분 곁에 있는 그분의 책에 그분의 자비가 그분의 진노를 이긴다고 쓰셨다. 사히흐 무슬림 2751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마르는 포로들이 예언자(ﷺ)께 끌려왔는데, 그 가운데 젖이 가득 찬 여인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 여인은 포로들 가운데서 아이를 찾을 때마다 가슴에 안고 젖을 먹였습니다. 예언자께서 이 여인이 자기 아이를 불 속에 던질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알라께서는 이 여인이 자기 아이에게보다 그분의 종들에게 더 자비로우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부 후라이라는 예언자(ﷺ)께서 마리아의 아들이 곧 공정한 통치자로서 무슬림들 가운데 내려올 것이라고 맹세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는 십자가를 부수고 돼지를 죽이고 지즈야를 끝낼 것이며, 재물이 너무 넘쳐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부 후라이라는 꾸란 4:159를 낭송했습니다. 성서의 백성 가운데 그가 죽기 전에 그를 믿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구절마다 살펴보기
요한복음 3:17 — 3장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인용 근거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는 사랑이며, 진노는 구약에 속합니다.
답변
같은 복음서는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 자신이 그의 왼편에 있는 자들을 영영한 불로 보냅니다.
결론 — 복음서들은 예수를 심판자로 삼으므로, 진노는 구약에 남겨지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19:15 — 19장 15절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전능하신 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인용 근거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칼은 무기가 아니라 그의 말씀입니다.
답변
그것은 인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징들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택해졌습니다. 거기에는 피 뿌린 옷,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 그리고 죽임을 당한 나머지와 그들의 살로 배부른 새들이 있습니다.
결론 — 상징으로 읽어도, 이 구절들은 여전히 사랑만이 아니라 심판과 전쟁을 그립니다.
누가복음 19:27 — 19장 27절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인용 근거
이것은 비유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그 귀인입니다.
답변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주석가들은 그 귀인을 그의 나라를 받으러 떠났다가 왕으로 돌아오는 그리스도로 읽습니다. 교회 자신의 읽기로, 그 비유는 그리스도가 그의 재림 때 무엇을 할지 보여 줍니다.
결론 — 그 비유에 대한 기독교의 읽기로, 그의 원수들을 죽이는 돌아온 왕은 그리스도입니다.
관점
주류 기독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분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지막 심판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보다 그분의 아들을 주신 것에서 드러났다고 봅니다.
요한일서 4:8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합니다.
반박
이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분의 이름 가운데 하나는 사랑하시는 분, 알와두드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심판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는 신약이 예수가 불꽃 가운데 돌아오는 것도 그립니다.
요한복음 3:17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반박
그 구절은 그가 왜 왔는지를 말합니다. 같은 복음서는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 자신이 그의 왼편에 있는 자들을 영영한 불로 보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보다 그분의 아들을 주신 것에서 드러났다고 봅니다.
반박
이슬람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에서 드러나며, 그것에는 아들을 주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꾸란은 그분의 자비가 모든 것을 포용한다고 말합니다. 예언자(ﷺ)께서는 알라(﷾)께서 어머니가 그 아이에게보다 그분의 종들에게 더 자비로우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슬람의 관점
알라(﷾)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시며, 예언자(ﷺ)께서 가르치셨듯이 그분의 자비가 더 큽니다. 신약 자체가 예수가 불과 전쟁 속에 심판자로 돌아오는 것을 그립니다. 그러니 그것은 오직 사랑뿐인 예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는 탄 자가 피 뿌린 옷을 입고 심판하며 싸우는 것을 그립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주 예수께서 불꽃 가운데 나타나 형벌을 주시는 것을 묘사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그의 왼편에 있는 자들을 영영한 불로 보냅니다. 요한은 모든 심판이 아들에게 맡겨졌다고 말합니다.
유다서 5절의 기독교 자신의 비평 그리스어 본문으로,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출애굽 뒤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했다고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그를 구약의 벌들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이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같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그는 구약의 전쟁들을 명한 주님이기도 합니다.
꾸란은 자비와 정의를 함께 가르치며, 예언자(ﷺ)께서는 알라(﷾)의 자비가 그분의 진노를 이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슬람은 예수가 돌아와 공의롭게 심판하리라고 가르칩니다.